‘울산의 별이 될래요! - 울산현대 이진호①’

울산시민들과 처용전사들에게 2005년을 회상해 보라고 한다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묻어나는 해일 것이다. 삼성 하우젠 컵 2005에서의 준우승, 그리고 삼성 하우젠 K리그 2005에서의 3위, 가슴에 별 하나를 달기까지...... 지금 회상하더라도 가슴이 설렌다.
아직까지 그 설렘이 채 가시지 않은듯하지만, 세월이란 녀석은 훌쩍 2008년으로 우릴 옮겨 놓았고, 울산에 많은 변화의 바람을 불러왔다. 우승의 주역이라 손꼽히던 몇몇 선수들은 새로운 곳으로 떠났고, 새로운 선수들이 울산에 둥지를 틀면서 축구종가의 면모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2008년, 2년 동안 기다려오던 그도 돌아왔다.
울산 시민과 처용전사들이 2년 동안 기다려왔던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2일 오전 11시 울산의 클럽하우스를 찾았다.
다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울산의 클럽하우스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그 적막함이 무거움으로 다가올 때 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내는 한 남자, 바로 울산현대의 이진호(25, 울산현대)이다.
지난 3월 9일, 삼성 하우젠 K리그 2008의 서막을 알리는 축포가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터졌다.
1:0으로 경기를 리드해가던 FC서울, 울산은 개막 첫날부터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되는가 싶던 찰라, 후반 28분 오장은의 머리를 맞고 굴절된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대부분의 울산 선수들은 서포터들을 향해 뛰어가는 오장은과 세레머니를 나누는 그 순간, 울산의 한 선수가 아크부분에서 감격의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오장은의 골을 어시스트한 이진호였다. 울산으로의 복귀전에서 공격 포인트를 올린 것이 감격스러웠던지, 한참을 홀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김정남 감독은 “경기가 1:1로 비기긴 했지만, 경기 내용이 좋았고, 이상호와 이진호가 좋은 활약을 보여주어서 기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기를 본 울산 팬들도 하나같이 이진호의 복귀를 반기며, 올해도 해결사의 역할을 기대했다.

그리고 울산의 홈경기 개막전이 열린 지난 3월 15일 울산 문수 경기장. 이진호는 자신의 홈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활발한 움직임으로 팀의 공격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3:0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날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는 단 1점에 그쳤지만, 그의 활약은 팀의 승리만큼이나 돋보였다. 스포탈 코리아에서 선정하는 K리그 2라운드 MVP의 자리에 오르며, 2005년도 승리의 보증 수표 역할을 톡톡히 한 그가, 2008년도에는 한층 향상된 모습으로 해결사의 역할을 담당해 나가고 있다.
3경기를 치루면서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울산이 다소 주춤거리기도 하였다. 염기훈, 우성용의 공격수 부상으로 당황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이진호가 있기 때문에 전력 손실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런 믿음에 보답하듯, 꾸준한 출장과 이상호와의 환상 호흡을 선보이며, 앞으로의 울산을 기대하게 하였다.

울산 시민과 처용전사들에게 앞으로의 울산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그. 그에게 울산은 어떤 팀일까. 단지 내가 프로에 첫 발을 들인 팀? 내가 지금 소속된 팀? 이런 시시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든 순간,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울산은...” 이라 운은 띄우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울산은..... 울산은 저에게 꿈이자, 형제예요. 태어나고 자란 곳이 울산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보러 공설운동장을 매일같이 찾아갔어요. 울산 문수구장이 지어지기 전까지 울산의 경기는 공설구장에서 열렸는데, 매 경기 관중석에서 울산을 응원하고, 저 경기장에서 공을 차는 선수들을 보면서 축구선수에 대한 꿈을 키워갔어요.
경기를 보러 경기장을 찾을 때 마다 꼭 울산의 선수로 저곳에서 공을 차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고, 매일 찾던 경기장에, 언제나 나의 팀을 응원을 하고 자라면서 함께 한 울산이기 때문에 형제 같아요.
그래서 경기장에 나갈 때 어린친구들이 환호해주고 이름을 불러주면, 언제나 손을 흔들어주면서 화답을 해줘요. 제가 그곳에 있었으니까요.”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나의 팀, 이제는 내가 뛰고 있는 울산. 그에게 울산은 꿈이자 형제였다.
뚜렷한 뱃길을 아는 항해사는 배를 아무런 탈 없이 항해한다. 암초에 걸리게 하지도, 길을 잘못 들어 되돌리며 방황조차하지 않는다. 무사히 선착장에 배를 이끌어 놓으며, 최고의 항해술을 뽐내곤 한다. 그 최고의 항해술에는 뚜렷한 뱃길과 목표가 있었기에 그의 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진호, 그도 그랬다. 어렸을 때 찾아간 공설운동장에서 울산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선수들을 보며 꼭 저곳에서 뛰기를 갈망했다. 그 목표 하나로 지금의 이진호로 발전을 한 그. 그래도 어린 마음에 운동장에서의 훈련보다는 친구들과 뛰어 노는 것이 더 즐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기자가 고개를 갸우뚱 거릴 때쯤, 그에게 들려온 단 한마디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축구를 시작한건 제가 해온 운동 중에 가장 질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웃음) 핸드볼, 야구, 기계체조..... 여러 운동을 했었어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신체조건이 남달랐기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랄까요? 그래서 어떤 운동을 시작 할 때도 주위에서의 반대는 전혀 없었어요.
다른 운동을 할 때는 얼마 되지 않아서 지루함을 느꼈는데, 축구만큼은 계속해도 지겹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포지션도 한 가지만 맞았던 것도 아니에요. 초등학교 때는 골키퍼, 중학교 때는 수비수, 그리고 미드필더, 지금 맞고 있는 공격수까지. 계속해서 포지션에 변화를 주었어요. 그때의 몸에 벤 기억이 공격할 때 많은 도움을 주어요.”
그가 싫증을 빨리 느낀다는 걸 아신 은사님들께서 계속적으로 포지션에 변화를 주어서 흥미를 떨어지지 않게 한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축구는 필연이었기 때문에 실증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축구가 좋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선수들은 어렸을 때 타지로 떠난 첫 전지훈련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듬직해 보이는 이진호지만, 어렸을 때는 겁 많은 어린이지 않았을까. 그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으로 “첫 합숙훈련과 전지훈련은 어떠셨어요?” 라고 던진 질문은 어쩜 이럴까란 생각을 가득 차게 하였다. 그의 대답은 다름 아닌 “재밌었어요.”였다.
‘너무 강한 척 하는 건 아닐까’ 란 생각에 진짜요? 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외동으로 자랐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을 하셨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런데 합숙을 하고 전지훈련을 하면서 친구들이랑 하루 종일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집에선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 심심하고 외로웠는데, 친구들과 계속 같이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밌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축구하는 것이 즐거웠던 이진호. 즐거운 합숙생활이지만, 다른 친구들은 놀러도 다니고, 여자친구와 데이트도 가는 것이 부럽진 않았을까? 창 밖의 따뜻한 햇살에 기자는 사춘기 시절, 봄바람이라도 불면 오후 보충수업에 도망을 치곤 한 기억이 떠올리며, 그에게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를 물어보았다. 역시나, 인생에 있어 돌아올 것을 알고 가는 도망은 한번쯤 있는 것이 아닐까?
“고등학교 2학년때 처음으로 도망을 쳤어요. 사실, 제가 가고 싶어서 갔었던 건, 아니고 친구들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어요.(웃음) 별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는데, 친구들 모두 도망치는데 저만 빠지면, 나중에 왕따라도 당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따라 나섰어요. 몇 일간 모은 돈으로 부산으로 가기로 하고, 새벽에 몰래 합숙소에서 빠져나와서 울산역까지 걸어갔어요. 학정고에서 울산역까지 엄청난 거리인데, 아마도 4~5km가 넘는 거리 일거에요. 그 거리도 마다치 않고 열심히 걸어서, 울산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고 내려갔어요. 부산에 가서도 돈이 없어서 해운대에서 광안리까지 걷고, 도망쳐서 한건 걸은 거 밖에 없는 거 같아요.
3일 정도 도망쳤는데, 나중엔 지쳐서 친구들이 하나씩 돌아가자는 거예요. 돌아가려고 주머니에서 남아 있는 돈을 봤는데, 이걸로는 울산까지 가질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택시를 타고, 학교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죠. ‘지금 부산에서 올라갑니다.’ 하고요. 택시 2대에 나누어 타고 울산으로 올라갔는데, 엄청 혼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택시비도 다 내주시고, 혼내지 않고 ‘축구 그만두려고 나간거냐?’ 하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요’라고 하니깐, 그럼 됐다 하시면서 넘어가셨어요. 아마 그때 많이 혼났더라면 삐뚤어졌을 거예요. 감독님께서 크게 혼내주시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받아주셔서, 지금도 참 많이 고마우세요.
도망 친 날부터 돌아온 날까지가 아마도 제 사춘기인거 같아요. 그래서 크게 방황한 적도 없었고, 다친 것 이외는 꾸준히 축구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별 다른 에피소드는 없어요.”
약 3일간의 본의 아니게 떠났던 도망. 그리고 그는 축구화 끈을 더욱더 단단히 묶으며 더욱 앞으로 전진해나갔다.

그리고 그해 태어나고 자란 울산을 잠시 떠나게 된 그. 브라질로의 축구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많이 낯 설은 환경, 하지만 브라질 특유의 환경에도 그는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음식, 문화가 이질감으로 다가와서 향수병에 걸릴 만도 했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그 것마저 즐겁게 받아드렸다.
"우리나라는 지나가는 옆에 사람에게 인사 거는 것이 좀 이상하잖아요. 그런데 브라질에선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이랑도 눈이 마주쳐도 즐겁게 인사하고 넘어가요. 뭐랄까요.... 음.....다른 것이 꺼려지기보다는 다른 생활을 하는 것이 재밌었어요.
그런 생활도 재밌었지만, 그곳에서 축구를 배우는 것도 즐거웠어요. 브라질 특유의 유연한 축구라던가, 배울 것이 참 많았어요. 그때의 배움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포르투칼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유학 갔을 때 힘든 것 보다는 배워서 온 것이 많아서 저에게 좋은 추억이에요.
음식도 가리는 게 없어서 그런지 맛있게 잘 먹었어요. 같이 브라질 유학을 갔었던 이호(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가기 전에는 엄청 작았는데, 너무 잘 먹어서 쑥쑥 클 정도였으니까요.(웃음)”
브라질, 포르투칼로의 유학,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울산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공설운동장에서,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가꿔온 꿈을 이룬 것이다. 2003년 울산의 유니폼을 입고 내가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멋지던 선수들과 함께 공을 차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했고, 설레던 그였다.
“제가 2003년도에 울산에 입단 했을 때, (유)상철이형, (이)천수형(페예노르트 로테르담),(정)경호형 등등 정말 공격진만 봐도 쟁쟁했어요. 그런 멋진 선수들이랑 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어요.
실력파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사실, 2군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렇지만 남 원망안하고, 다른 선수들의 장점을 보면서 더 배우려고 하고, 제 실력이 부족한 걸 더욱 보충하려고 노력했어요.”
꿈에 그리던 울산의 유니폼을 입고 울산의 선수가 된 그. 하지만 많은 기회를 잡을수 없었고, 2군에서 운동을하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도 K리그 출전의 기회가 오게 된다.
K리그 명예기자 장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