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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광의 진솔한 이야기 [한국프로축구연맹]

작성자 : UHFC작성일 : 2009-07-23 17:17:45조회 : 21615

슈퍼세이버 김영광 골키퍼의 소년 시절의 추억과

휘어진 손에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

 본 기사는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에 등록된 글이며, 저작권은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있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의 어느 시골 소년은 오로지 축구가 하고 싶었다. 그 소년에게 축구는 소망이자 희망이었다. 어느 포지션이든 상관없었다.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감사했다. 부모님의 반대도 소년의 축구에 대한 사랑과 눈물로 보인 열정에 허락으로 바뀌고 말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휘어지는 고통 속에서 어린 소년은 축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소년은 가장 주목받지 않은 자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로 성장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김!영!광! 대한민국 대표 수문장 울산 김영광 골키퍼를 지난 15일 울산 클럽하우스에서 만나보았다.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자체에 감사한 소년의 시작!
 
 여느 선수와 마찬가지로 단지 축구가 좋아서 시작했다. 소년의 처음도 골키퍼가 아니었다. 수많은 포지션 중 가장 외로운 자리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소년은 단지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제일 처음 해남동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골키퍼를 하지 않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일 때문에 순천으로 이사 가서 순천 중앙초등학교에 처음 갔는데 해남 동초등학교와는 완전히 차이가 달랐죠. ‘우와! 저렇게 잘하는 선수가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어렸을 때도 덩치는 어느 정도 있었는데 생김새와 키에 비해서 센터포워드를 너무 못했어요. 공격수부터 미드필드, 스토퍼도 다해봤어요. 최종적으로 해본 포지션이 사이드 어택커로, 2개월 버티다가 새로 전학 온 애한테 밀리고 공이나 열심히 주웠죠.(웃음)”


 “그러던 중 골키퍼 잘 하던 애가 다쳐서 친구인 고양 국민은행 김병곤 선수가 골키퍼를 계속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병곤이도 다쳐서 골키퍼 할 사람이 없었는데 감독님이 저를 테스트 했는데 잘 막아서 그때부터 골키퍼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죠.(웃음)”


 골키퍼가 좋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골키퍼로서의 길을 가고자 집에 와서 부모님께 골키퍼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여기서 축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소년은 눈물 섞인 열정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얻어내며 골키퍼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제가 축구할 당시에는 골키퍼에 대한 사람들의 주목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요. 김병지 선수가 한창 골키퍼 붐을 일으킨 찰나에 골키퍼를 하기 시작했죠. 제일 처음에 부모님께 골키퍼 한다고 하니까 그만두라고 하셨는데, 저는 왠지 골키퍼가 하고 싶었어요.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어떤 포지션이던 간에 축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골키퍼도 상관없었죠. 축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무릎 꿇고 울면서 비니까 결국 골키퍼 한 번 해보라고 격려해주셨죠.(웃음)” 


 부상으로 이뤄 낸 영광의 상처!


 소년은 골키퍼로서의 재능이 남달랐다. 두각을 나타내며 유소년 상비군에 뽑혔다. 이어서 주니어 대표팀에도 뽑혔다. 소년은 대표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성장했지만 소년의 손은, 뼈마디가 변형되어갔다.
 
 “손은 주니어 대표 할 때 다쳤어요. 그 때 감독님이 고등학교때 감독님이신 기영욱 감독님 이셨죠. 아시아 지역예선 하기 일주일 남겨놓고 운동하던 도중에 슈팅을 막다 공에 손이 꺾여 뼈가 골절이 되었어요. 관절이 올라와서 닥터님이 급하게 쭉 뺐는데 이미 안에서 뼈가 다 부서진 상태였죠.”


 “손가락이 부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는데 기영욱 감독님께서 저를 믿으시며 부러진 상태인데도 ‘경기 나가서 서있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된다’고 하셨죠. 그래서 손에 쇠 받침대를 하고 붕대를 칭칭 감고 대회를 나갔어요. 대만 중국 우리나라가 한 조였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이 대만을 똑같이 6:0으로 이겨서 마지막 경기가 피 튀기는 경기가 되었죠. 중국이37~38개 슈팅을 때렸는데 제가 다 막았어요. 그렇게 비긴 상태에서 승부차기를 했는데 중국 골키퍼 키가 190이었어요. 저는 그 당시 174,5 정도였는데 신체조건에서 완전 밀렸죠. 손가락이 아픈 상태에서 승부차기 2개를 막고 이겨서 난리가 낫죠.(웃음) 그래서 그 뒤에 청소년 대표도 되었죠.(웃음)”
 
 “뼈가 골절이 되어 있으니까 슈팅을 막을 때 최대한 맞지 않으려고 손을 뒤로 빼고 막는데도, 충격이 가면 손가락이 들려서 굽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경기 중에 터득한 것이 있는데 이빨로 손을 한번 쭉 빼면 괜찮아 져서 슈팅 한 번 막고 입으로 손가락을 물어 뺀 것이 38번이나 되었죠.(웃음) 시합 끝나고 병원을 갔는데 이미 늦어서 깨진 뼈가 다른 뼈마디로 넘어와서 다른 부분에 붙어버렸죠.”


  

 소년의 뼈마디 마디는 다 휘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 아픈 고통도 축구를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소년의 착한 마음은 소년을 전남 지역의 중학교에서 대표 선수들만 갈 수 있다는  광양제철고로 이끌었다. 한 자리 밖에 없었던 골키퍼의 자리는 소년의 몫이었다.


 “제철고 같은 경우가, 그 때 당시에 신생팀이었는데 성적을 빠르게 내서 강호로 인정받았어요. 그 당시 고등학교 축구 시스템이 잘 갖춰줘 있었죠. 제철고 가는 것이 중학교에서 잘 하는 선수들만 가는 것이었고, 전남 대표팀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순천 매산중에 있을 때 중학교 감독님이 주니어대표 감독님이시기도 하셨던 기영욱 감독님이셨는데 감독님이 제철고로 가시면서 저를 데리고 가셨죠. 당시 제철고 주전들이 주니어 대표 1년 선배들이었는데 감독님께서 저를 잘 봐주셔서 고등학교에 가자마자 바로 주전으로 뛸 수 있었죠.”


 소년은 어느덧 청소년 대표 선수로 성장했다. 2003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는 그에게 아쉬움 그 자체였다.


 “정말 아쉽죠. 일본이랑 대회전에 4번 싸워서 4번 모두 이겼는데 정작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 16강에서 져버리니까 많이 억울했죠. 진 것 때문에 충격도 받았고 아시아 대회에서 이겼던 것이 소용없었다고 생각했죠. 진규랑 저랑 무릎 꿇고 눈물 흘린 장면이 신문에도 나오더군요.(웃음)”


 그의 눈물은 점차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또다시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어린 시절 그랬듯이 그는 참고 대회를 나갔다.
 
 “김성수 선생님이랑 같이 훈련 하다가 아테네 올림픽 나가기 전에 인대가 끊어져서, 아테네 대회 나갈 때 장갑의 손가락 두 부분을 이어 나갔어요. 하나 막으면 고통이었죠. 손에 공이 닿으면 전기가 왔어요. 인대가 끊어진 상태에서 대회를 나가서 너무 아팠죠.”


 아테네 올림픽의 추억!


 “처음 올림픽 대표로 뽑혀서 대표팀에 갔는데 골키퍼가 저·김지혁·박동석 골키퍼가 있었어요. 저는 좋았던 것이 저는 전남에서 경기를 뛰고 대표팀을 갔었고, 김지혁·박동석 골키퍼는 팀에서 경기를 많이 못 나간 상태에서 대표팀에 왔어요. 경기를 뛴 선수가 감각이 좋지 않겠냐는 김호곤 감독님의 말씀에 대구에서 아이트호벤과의 경기 때 처음 올림픽 대표로 데뷔했죠.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고 그 경기 이후 올림픽 대표에서 계속 경기를 나가게 되었죠.”


 그리고 그는 2004년 여름 아테네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그는 인대가 끊어진 부상 속에서도 눈부신 선방을 보이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2002 월드컵 이후 워낙 축구 붐이 불어있던 상태였고, 그 때 당시에 축구를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리스전에서 2골 먹었지만 잘한 경기는 아니고 나름 경기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휴식시간에 잠시 선수촌에서 인터넷을 하는데 미니홈피 하루 조회수가 10만명이 넘었어요. 하루에 20만명, 30만명이 들어왔죠. 깜짝 놀라서 제 눈을 믿을 수 없어서 컴퓨터를 다시 껐다 키고 보고 그랬어요.(웃음) 한국에서 난리가 낫다고 전화가 왔는데 그 경기 이후 이름을 알리게 된 거였죠.”


 하지만 청소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대회도 그에게는 아쉬움이었다.


 “말리전에 극적으로 비겨서 8강전을 갈 수 있어서 정말 기뻤죠. 8강전 파라과이 전은 너무  아쉬웠어요. 경기 시간이 5분만 더 있었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후반전 20분 남겨 놓고 파라과이 선수들이 녹초가 되어서 움직이질 못했거든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그의 노력은 계속 인정받았다. 거칠 것이 없었다.


 “올림픽 갔다 오자마자 국가대표팀에 처음 뽑혔어요. 그 당시 감독님이 코엘류 감독님이셨는데 오만과의 평가전에서 후반전에 교체 투입 되어서 15분 정도 뛰었죠. 신기한 것은 타이밍이 좋았어요. 주니어 대표하고 바로 청소년 대표 했고, 청소년 대표하고 바로 올림픽 대표로 이어진 것처럼 국가대표로도 이어졌는데 운도 좋았고 제 나이대가 시기적으로 좋았던 것 같아요.”


  
                                                        (C) 울산 현대
 
 프로의 어려움을 실감한 청년!


 어렸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그에게 프로의 벽은 높았다.


 “처음에는 욕심이 많았어요. 중학교랑 고등학교 모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고, 시합에서 밀려본 적이 없었죠. 저는 제가 열심히 하면 당연히 게임 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프로는 고등학교와 차원이 달랐는데 선수들의 사고방식과 프로의 자존심 같은 것이 달랐어요. 잘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어려움을 겪던 프로 초년생 김영광에게 프로를 배우게 해준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 당시 최고 고참이었던 노상래 선수가 최고 막내인 저를 세워 놓고 슈팅을 때렸는데 워낙 센 분의 슈팅을 수없이 막다보니 적응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너무 세서 하나도 막지  못했는데 ‘나는 이것 밖에 안되구나.’하는 좌절감이 밀려왔죠. 오기가 생겨서 계속 슈팅을 때려달라고 했고, 계속 하다 보니까 적응력이 생겨 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죠. 1년 동안 게임 못 뛰면서 적응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전남에 골키퍼 제일 잘한다는 저·염동균·이정래 3명의 골키퍼가 다 모였어요. 처음 전남에 갔는데 번호도 제가 꼴찌였죠. 41번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자존심 상해서 이 번호를 달고 주전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남들 잘 때 가서 운동하고 준비해서 1년 지나고 다음에 부천과 첫 게임을 했었죠.”


 “그 뒤부터 벤치에 같이 앉고 따라 다녔고, 그러다가 성남전때 들어갔는데 운이 좋았는지, 아님 준비를 잘했는지, 잘 막아서 성남을 이기는 바람에 그 뒤부터 주전으로 계속 나가게 되었죠. 


 이후 2004년, 2005년 전남의 붙박이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던 중 시련이 찾아왔다. 부상으로 인하여 주전 자리도 내주었고, 팀은 2006년 FA컵을 우승했지만 그의 몫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고향팀 전남을 떠나 새출발을 하였다.


 “FA컵 결승전 당시에 대표팀에 있어서 결승전에 가지를 못했어요. 그 때 당시 제가 부상을 당해서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재활 운동을 했는데 재활이 잘 되지 않았는지 프로 경기에서 경기력이 좋지 않았죠. 그래서 동균이와 1경기 씩 번갈아 가며 경기에 출전했는데, 그때 사람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인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제2의 고향 울산에서의 출발!


 2006년 말! 그는 전남을 떠나 울산에 입단하게 된다. 김영광을 그토록 원했던 울산의 구애에 김영광은 고마움을 느꼈다.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울산현대에서 거금을 주고 스카웃을 해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당시 저의 이적료가 비쌌는데 큰돈을 주고 저를 데려와 준 것이 믿음을 주었고 꼭 이 팀에서 우승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선수들이 더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더 큰 팀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있었고, 저 개인적으로도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었고, 울산은 꼭 오고 싶었던 팀이었죠.”


 “울산이 제2의 고향이이에요. 저는 전남을 벗어난 적이 없었죠. 제가 시련을 겪고 안 좋은 상태에 있었을 때 저를 데려와 준 팀이기 때문에 저한테는 구세주였죠. 골키퍼니까 최대한 실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운동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울산이란 좋은 구단에게 보답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해요.” 
 
 울산에 오자마자 그동안 부진이 있었냐는 듯, 그는 뛰어난 활약으로 울산에 컵대회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울산에 온 첫 해에 컵대회 우승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김정남 감독님이 ‘영광이 너가 와서 잘 해서 우승했다’고 해주셔서 눈물이 났죠. 꼭 울산에서 리그 우승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C) 정선녀

 울산에서의 하루하루는 행복했다. 2007년 올스타전 인기투표 1위도 차지했다.


 “운동장에서 지지 않으려는 그런 모습이, ‘저 선수는 승부욕이 강한 선수다.’라는 생각을 팬 분들이 하신 것 같아요. 축구선수로서, 골키퍼로서의 좋은 모습을 매력 있게 봐주셔서 인기투표까지 1등을 한 것 같아요.(웃음)”
 
 행복할 것만 같았던 울산에서의 첫 해! 마지막 플레이오프 대전과의 경기에서 그는 대전 써포터즈들이 던진 물병을 다시 관중석에 던져 6경기 출전정지에 벌금 600만원 중징계를 받았다.
 
 “그 때 제가 무조건 참았어야 했어요. 그 일이 있은 후 많은 생각을 했는데 대전 써포터즈 들이 ‘대전팀을 얼마나 사랑하면 저럴까?’하는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되더군요. 더군다나 2:0으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전은 플레이오프를 힘들게 올라왔는데, 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갔어요. ‘내가 조금만 생각을 더 했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하고 진짜 후회를 많이 했죠.”


 이 일이 있은 후 대전 써포터즈 퍼플크루와 김영광은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고, 이 일은 그를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2009년 울산에서 그는 반가운 스승들을 만났다. 올림픽 대표 시절 함께했던 김호곤 감독, 이상철 코치, 김성수 코치와 재회를 한 것이다.


 “아테네 올림픽 이후 4,5년 만에 다시 만났어요. 원래 배웠던 스승님들을 다시 만나니까 너무 좋았죠. 제가 선수로서도 잘 된 이유가 그 당시 대표팀 감독님, 코치님들 때문에 많이 성장했기 때문에, 우리팀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어요.”


 “감독님, 코치님들이 늦게 결정나는 바람에 준비할 시간이 많이 없어서 전반기에는 많이 좋지 않았지만 후반기에는 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속되는 자기 관리, 그리고 소망


 울산의 성적 부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8년 만에 짧게 자른 머리가 어색할 줄 알았지만 그의 다짐을 돋보이게 하였다.
 
 “고2 이후로 처음 잘라봤어요. 긴 머리를 선호했었는데 골키퍼는 긴 머리 보다 짧은 머리가 더 좋아요. 시야적으로 방해가 안 생기거든요. 공에 대한 집중력도 더 생기는데 슈팅 막을 때 땀을 흘리면 긴 머리가 눈을 가리고, 눈을 깜빡하는 순간 골이 들어가 버리게 되죠.  앞으로는 짧게 할 것이에요.(웃음)”


 그는 체중도 감량하여 아테네 시절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작년에 비해서 5kg 빠졌어요. 김성수 코치님이 워낙 운동을 많이 시키셔서 몸이 많이 좋아졌죠. 89kg이였는데 휴가 때 조금 많이 쪘다가 82kg까지 뺐어요. 살을 빼니까 몸은 가벼워서 민첩성이 커지는데 점프가 되지 않아요.(웃음) 원래 뼈대도 굵고, 고근력이 과다로 나오고 지방은 별로 없었어요.(웃음)”


 “다이빙을 하는데 멀리 탄력이 없어서 멀리 가지 않아요. 식이요법도 하면서 고기 안 먹고 야채 먹으면서 조절했는데 운동선수는 단기간에 살 빼려고 하면 되지 않고 체중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줄여야 해요. 2달을 그렇게 했는데 도저히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체중을 조금 늘려 지금을 유지하고 있죠. 올림픽때 84kg이였는데 지금 그 정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는 골키퍼란 자리가 고독한 자리이자 동시에 어려운 자리라고 한다.


 “골키퍼는 골로 들어갈 공을 막았을때, 관중들의 함성소리·박수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질 때 감격에 차요. 하지만 10번 잘 하다가 1번 못하면 욕먹는 고독한 자리이기도 하죠. 결정적인 위기를 막지 않고서는 팬들에게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며 개중에는 ‘오늘 골키퍼 뭐 한 것도 없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에요.”


 “골키퍼는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90분 경기 내내 공에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경기 끝나고 나면 머리가 많이 아파요. 특히 야간 경기 하면 새벽 3,4시 까지 잠을 못 자는데 계속 신경을 쓰다가 긴장이 풀어져 버리니까 잠을 못 자게 되는 것이죠.”
 
 그에게는 작은 소망이 있다. 리그에서의 우승과 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리그 우승은 너무 해보고 싶어요. 우승 한다는 생각만 해도 벅차네요. 리그 우승이란 것은 진짜 최고 중의 최고며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런 영광스런 것이죠.”


 “대표팀에서는 초반에 허정무 감독님 부임했을 때 아시안컵 가지 못한 뒤부터 합류해서 제3의 골키퍼였는데 대표팀에서 좋은 기회를 주시고, 좋게 봐주시는 것만큼 열심히 할 것이에요. 예전 대표팀 경기 때 실수 아닌 실수를 몇 번해서 기회를 놓쳤지만 다시 기회가 오면 꼭 잡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이전에 팀에서 잘해야 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팀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 우선이겠죠.”


 골키퍼가 아니었더라도 축구를 계속 했을 것이라는 김영광! 단지 축구가 좋아서, 축구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축구선수의 삶! 가장 주목받지 않은 골키퍼란 자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한민국 대표 수문장으로 성장한 김영광! 손에 있는 영광의 상처처럼, 그의 이름 영광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나가는 그는 대한민국 대표 넘버원 축구 선수이다.
 

K-리그 명예기자 한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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