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은 나의 힘 - 울산 현대 현영민’
말은 내면의 모습을 비추는 것,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이미지가 된다. 현영민,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그에게서 풍긴 거침없으면서도 풋풋함이 묻어났다. 그를 보고 있자니 도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난 9월 5일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던 울산현대의 클럽하우스, 가을의 선선함이 한껏 다가와서인지 싱그러운 날씨가 인터뷰를 위해 그를 기다리던 기분마저 싱그러웠다.
풋풋함이라는 싱그러운 단어가 서른의 현영민과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침없는 도전을 가슴에 품은 그의 내면을 마주한다면 풋풋함이라는 단어가 그에게서 오버랩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아이의 아버지가 된 기쁨 때문인지 더욱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 오는 그였다.
2002년 대한민국을 붉게 물들였던 그해 여름, 그 열기의 중심에 있었던 현영민. 온 나라가 대한민국에 떠들썩했던 그 시기, 그 관심이 컸기에 벤치의 그를 기억하곤 한다. K-리그 팬이라면 현영민이라는 그를 잘 알 것이다. K-리그에서 손꼽히는 왼쪽윙백으로 기억하는 이들, 자선축구에서 배꼽 잡는 헛다리짚기를 하던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릴 적의 그를 축구 유망주로 각인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그를 축구 길로 인도한 은사님. 축구보다 야구에 더욱 관심이 많았던 그였지만, 광희초등학교 축구부 감독님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반 대항 축구시합이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뛰는 모습을 보시고 감독님이 저에게 축구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볼을 차는 걸 보시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오셨어요. 사실, 그 당시에는 축구보다는 야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스카우트가 들어오니까 축구부에 들어가긴 했죠. 하지만 그 당시만하더라도 축구로 무엇을 하겠단 생각은 없었어요. 합숙을 하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것도 없었어요. 막연히 볼을 차는 게 즐거웠어요. 재미있게 볼을 차다보니깐 어느새 축구 선수가 되어있더라고요.(웃음)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건 중학생 시절로 봐야할 것 같아요.”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건 다소 늦었지만, 동네에서는 볼 차는 말썽꾸러기아이였어요. 집 근처에 지하도가 있었는데, 거기서 친구들이 4~5명만 모이면 축구를 했어요. 지하도니깐 춥거나 비가오거나 상관없이 볼을 찰 수 있었죠. 거기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을 차고 있으면 밖에서 ‘영민아, 밥 먹어’ 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기억나요. 볼 차는 게 너무 재밌다보니까 ‘엄마 쫌만!’이라고 언제나 대답했죠.(웃음) 거기서 볼을 차면서 천정의 형광등도 많이 깼어요.”라며 어린 시절 볼 차던 자신을 회상했다. 그의 모습에선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집에서 막내아들인 그는 중학생이 되던 시절 지금과는 다르게 왜소한 소년이었다. 또래 아이들 보다 왜소한 아들이 운동하는걸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한없이 아렸다. 그런 부모님의 걱정이 담긴, 그리고 응원이 담긴 보약과 비타민을 먹으면서 운동에 전념했다. 그 마음이 담긴 비타민은 그의 몸 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만들어줬다.
“저는 축구를 하면서 감독님이 무섭거나 합숙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다른 선수들은 체벌이나 선배들이 무섭고 했다고 하는데, 전 너무 좋은 분위기 속에서 볼을 찰 수 있었어요.”라며 그의 학창시절을 이야기 해나갔다.
축구선수에게 있어서 한번 쯤 들어보는 합숙소 탈출 에피소드, 역시나 좋은 환경에서 볼을 차던 그였지만 관행처럼 여기는 탈출을 피하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축구부 친구들과 단체로 합숙소를 나온 적이 있어요. 나오고서는 막연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주유소를 갔죠. 주유소 사장님께서 이력서를 써오라는 거예요. 당시 이력서가 먼지도 모르겠고, 고민하다가 이력서를 쓰는데 제 이력은 축구로 채워지더라고요. 다음날부터 출근을 허락받고 새벽에 친구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부모님이 어떻게 아시고 오셨는지 절 찾아 오셨더라고요. 그렇게 잡혀 들어갔는데, 그 하룻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일 와 닿았던 생각은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공할 수 없겠구나.’라는 거였죠. 결국 주유소의 꿈은 접었죠.(웃음)”
주유하고 있는 현영민보다 축구선수 현영민이 훨씬 잘 어울리지 않은가. 방황은 잠시, 그는 다시 축구에 매진했고 대학교 진학을 하며 새로운 목표와 각오를 다짐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 시절에는 프로에 입문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어요. 입문한다고 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서 대학교 진학이 당연한 거라 여겼어요. 그렇게 건국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대학 선발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대학교 4학년 때는 국가대표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어요.”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던 그. 이내 목표는 현실이 되었고, 그리고 꿈에 그리던 태극 마크를 가슴에 세길 수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동아시아와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태극마크를 달았어요. 꿈만 같았죠. 노력에 노력을 다해 얻은 결과니깐 기쁠 수밖에 없었죠. 그 시작이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까지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대학교 4학년 때 올림픽 대표 소속으로 국가대표선수들과 경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히딩크 감독님 눈에 차두리, 최성국 그리고 제가 연습생으로 들어갔어요. 테스트 겸 국대 선수들과 훈련을 했고, 그 기회에 최선을 다했어요. 열심히 하다보니깐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 계기로 국가대표에 발탁 될 수 있었죠.”
꿈만 같던 태극마크, 그리고 월드컵. 2002년 대한민국이 뜨겁게 타오른 만큼, 그의 가슴도 그해 여름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정작 월드컵 무대에서는 한 경기도 뛸 수 없었어요. 큰 무대에서 뛰어보고 싶은 열망은 컸지만, 아직 그만큼의 실력이 되지 못했다는 걸 느낀 만큼 더욱 열심히 훈련했고, 주전 선수들 못지않은 훈련 양을 소화했어요. 그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지만 경기에는 함께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현장에서 선수들과 나눈 감동과 추억들은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추억이에요.
한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너무나 좋은 혜택과 부와 명예를 얻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너무 많은걸 얻은 행운아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도 계세요. 어쩌면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제가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 행운도 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노력하는 자에게 행운이 온다잖아요.
2002 한일 월드컵은 저에게 좋은 추억이고, 자산이에요. 세계적인 감독님의 밑에서 훈련 할 수 있었고, 경기장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의 움직임을 직접 볼 수 있었던 좋은 추억이죠. 그 선수들의 움직임은 제가 축구 공부하는데 있어서, 지도자가 되어서도 좋은 자산이 될 거에요.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제가 축구를 하면서중 가장 좋아하신 것 같아요. 자식 노릇을 한 거 같아서 저 또한 기뻤죠.(웃음)”
열광하던 붉은 악마, 붉은 물결들...... 2002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고 설레고 함께 울고 웃던 날들이었다. 그랬기에 태극전사들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고, 오빠 부대와 고향에서의 금의환향 등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온 국민을 울고 웃게 만들어 주었던 태극전사들, 그 중심에 있던 그. 그래서 그는 이런 저런 말들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의 실력에 찬사를 보내는 이가 있던 반면에 그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들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런 시선들과 편견에 그는 노력과 실력으로 대응해나갔다. 한 발짝 더 뛰었고, 한 번 더 연습했다. 그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그는 프로에 입단하게 되었다. 2002년 후반기 시즌 울산 현대로 입단하게 된 그.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로 수많은 오빠 부대를 이끄는 한 중심에 서, 울산의 기대를 모으며 울산현대에 입단했다. 감독님과 코칭스태프 또한 그에 대한 믿음이 컸다.
팀에 합류하자마자 출전명령이 그에게 떨어졌다. 팀 훈련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코칭스태프의 믿음과 그의 실력이 반영된 출전이었다.
“팀에 합류하자마자 후반기 시즌 첫 경기였어요. 부산과의 원정 경기였는데, 후반 교체 출전이었죠. 들어갈 때 감독님이 제게 ‘송종국을 마크하라’라는 지시만 하셨어요. 그래서 경기내내 (송)종국형을 잡기위해 뒤만 쫓아 다녔죠. 아마 들어가자마자 3분 만에 (송)종국형에게 거친 파울로 경고를 먹었죠.(웃음) 경기에 나가서 돌파를 당해도 억울한 마음보다는 ‘저 형은 인정받고 있으니깐, 아직 저 형보단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란 생각이 컸어요.
팀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뛰는 경기였기에 팀 선수들도 잘 모르고, 전술도 몸에 덜 베인 상황에서 감독님과 코치님들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 악물고 뛰었어요. 제 첫 프로 데뷔는 이 악 물고 뛴 기억이 생생해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 아닌가. 믿음으로부터 힘이 솟아나고, 믿음에 저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욱 노력한 그였다. 그리고 중요한 경기에 그는 공격 포인트를 올리며 그 기대에 부흥했다.
“그때 당시 팀이 시즌의 우승을 하느냐, 못하냐 하는 상황이었어요. 전북에서 원정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한방에 올렸죠. 어시스트 하나와 득점 포인트를 올렸어요. 팀은 3대2로 이겨 우승의 희망을 잡을 수 있었죠.
제가 울산에 입단할 때 제 위치에 다른 선수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선수를 다른 팀의 선수와 트레이드 했다고 들었어요. 경쟁자가 다른 팀으로 가서 쉽게 안착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고, 그 믿음에 부흥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훈련했죠. 그 선수보다 못하단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요.”
현영민의 앞은 막힘이 없어보였다. 그리고 울산 또한 예전과는 다른 강팀이 되어있었고, 언제나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 거침없는 행보에 어떤 팀이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영민은 거침없는 행보에 쉼표하나를 찍어 넣었다. 부상이라는 쉼표, 그에게 부상은 쉼표 일뿐이었다. 무릎 부상과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시작 전에 마음먹었던 전 경기 무 교체 출장 목표가 잠시 쉬게 되었을 뿐, 다시 현영민은 그라운드로 복귀하여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2005년 울산은 개막전부터 승리일 이끌며, 울산의 고도행진을 예고하였다. 하지만 잠시 주춤하며 ‘울산이 우승 전에 플레이오프이라도 못 나가겠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울산은 한 경기 한 경기에 투혼을 발휘하며 리그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에 대한 열망을 보였다. 울산은 기필코 이겨야 됐고, 다른 팀의 경기 결과 또한 지켜보아야 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펼쳤다. 울산은 전북과의 원정길에 올랐고, 경기는 예상외로 전북의 선점으로 펼쳐졌다. 0대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선수들은 희망의 불씨를 꺼버리지 않았고 3대2로 역전했다. 그리고는 타 팀의 경기결과를 지켜보며 하늘의 뜻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전북과 원정경기였어요. 꼭 이겨야 되는 경기였는데 그런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생각만큼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어요. 하프 타임 때 라커룸에 들어가서 꼭 이기자며 필승을 다짐했고, 그리고 3골을 넣으며 우리가 역전 승 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다른 팀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됐어요. 저희가 먼저 경기가 끝났었거든요. 경기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시간이 안가는 거예요. 일분일초가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 건지.
감독님이 전화 통화를 하시고, 다른 팀의 경기결과가 무승부로 마무리 되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우리가 승점이 앞서 플레이오프에 진출 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아마 우승 했을 때 보다 더 극적 이였기 때문에 아마 우승컵 들었을 때 보다 눈물이 더 많이 난거 같아요.
(그럼 우승 때보다 더 기뻤나요?) 그래도 우승이 더 좋죠.”
극적인 울산의 플레이오프 진출, 다시 울산은 거침없는 호랑이로 돌아온 것이다. 마지막 경기, 챔피언 1차전을 인천문학경기장으로 원정길에 오른 울산. 서로 양보 할 수 없는 경기인 만큼 선수들은 더욱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었고, 경기 또한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서의 5-1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울산. 언론들과 팬들은 울산의 우승을 점치고 있었고, 울산은 드디어 홈에서 우승컵을 들게 된다. 그 중심에 현영민, 그 또한 그곳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었다.
우승의 기쁨도 잠시, K리그에서, 울산에서, 명성을 떨치며 지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바로 러시아리그로의 진출을 꿈꾸었고,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적한다.
낮선 나라 러시아, 그리고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지 같은 러시아프로리그. 10명중 10명이 말리는 그 곳이었지만, 그는 새로운 곳에 대한 열망과 유럽리그를 몸으로 느끼길 원했다.
“7월경 제니트에서 오퍼가 왔어요. 그때이적을 했으면 했지만, 구단과 주위에서 울산의 우승을 함께 하자고 하더라고요. 저 또한 제 팀 울산의 우승을 지켜보고 싶었고, 크게 돕고 싶었어요. 그래서 해외진출을 잠시 접었죠. 그리고 제니트에서 다시 연락이 왔어요. 여름에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었어요. 울산에서 리그 우승컵도 들었고, 저도 새로운 곳을 가고 싶은 욕심이 들었죠.
모두가 말렸어요. 러시아 리그에서 나오려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가려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이제부터 울산의 중요한 경기가 많이 열리고, 거기서 더 좋은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요.
이적 당시, 제니트는 왼쪽 사이드 어택이 아닌 오른쪽에서 뛰길 원했어요. 포지션 변경의 문제도 있었고, 다들 말렸어요. 하지만 구단에서 저의 도전을 지지해주었고, 제니트와 의견이 수렴이 잘 되어서 러시아 땅을 밟을 수 있었죠”
머나먼 서방국가의 리그, 어쩜 두려움이 클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신기하고 즐거운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평생을 같이 할 반려자와 함께 떠나며, 그는 후퇴하지 않고 전진하기위해서 노력했다.
“러시아에 가면서 지금의 아내와 함께 갔어요. 서로 많이 의지하고 지냈죠.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집에서 둘이 함께 지냈어요. 영화도 보고, 어학 공부도 하면서요. 낯선 곳이지만 저를 위해 함께 떠나준 아내에게 너무나 고마워요. 그리고 허락해주신 장인어른께 너무나 감사하죠.
ⓒ현영민
딸을 먼 곳에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걱정이 컸겠어요.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나만을 믿고 함께해준 아내에게도 감사하구요.”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에게 따스하고 편안한 미소가 입가를 맴돌았다. 국내 운동선수와 미녀와의 결혼의 대표적인 커플로 불리는 현영민-안춘영 커플. 이제는 부부로 인연을 맺고, 그 둘을 닮은 딸아이까지 낳아 알콩 달콩 살아가고 있다. 딸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은 이 세상 모든 걸 가진 한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다.
“모두가 저를 닮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부인을 닮아야 된다면서 절 닮을 거란 생각 하면 안 된다고 했죠.(웃음) 딸이니깐 저보다는 아내를 닮는 게 훨씬 낫죠.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부인이 자기 어렸을 때를 쏙 빼닮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이 자랑에 한껏 빠진 그. 그리고 아내분의 미모를 닮은 아이는 얼마나 예쁘겠냐며 옆에서 부추기자, 그는 그라운드에서 만큼 활발한 얼굴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국내 운동선수 중에서 최고 미녀와 결혼한 남자라면서요. 자기 외모가 제일이라면서요.(웃음) 그러면 전 장난삼아 그런 거 알아주는 사람 없다면서 맞받아치죠. 외모도 뛰어나지만, 외모보다 마음이 더 고와요. 제가 운동하는 걸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니까요.”
외모도 국내에서 빠지지 않는다며 은근히 아내의 외모에 뿌듯해 하고, 그녀의 내조에 감사해하며, 은근슬쩍 아내의 자랑을 한줄 적어주길 부탁하는 그다. 나의 평생의 반려자,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을 낳아준 아내가 예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말한다. 현영민의 러시아 리그 진출은 실패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에게 실패가 아닌 새로운 도전이었고, 많은걸 얻고 돌아온 기회가 되었다. 러시아에서의 생활 모든 면에서 적응이 되어가는 그때,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한다. 다시 한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한다.
“러시아에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있었고, 감독님이 새로이 부임해오셨어요. 아드보카트 감독님 체제로 적응해야 됐죠. 제가 어떤 선수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하고 잘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훈련도 성실히 임했죠. 게임 출전 횟수가 적었지만, 감독님께서 많은 기회를 주셨어요. 제가 왼쪽에서 잘 뛴다는 걸 알고 왼쪽으로 포지션을 옮겨주셨고, 많은 배려가 있었어요. (김)동진이나 이호와는 반대로 출전 횟수가 적어서 낙동강 오리알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감독님께서 저를 알 수 있었던 시간이 3~4개월 밖에 없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 기회를 주셨고 제 포지션에서 뛸 수 있게 해주셨어요. 저를 보일 수 있는 시간이 짧았지만 무엇보다 세계적인 감독님의 밑에서 배울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닥 생각해요.
러시아에서 힘들어지려는 찰나 울산에서 다시 불러 주셨어요. 도전을 ?기엔 현실을 보는 눈을 더 키운 거죠. 제니트에서도 1년 남은 계약기간을 다 채우길 원했어요. 하지만 저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조정이 잘 돼서 다시 울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꿈보다는 현실을 좀 더 생각하게 된 그, 한국으로 돌아온다. 친정팀 울산으로의 복귀, 그리고 울산은 또다시 현영민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복귀하고 부담이 많았어요. 러시아에서 생각만큼 큰 활약을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요. 울산에서 점점 출전을 늘리면서 경기에 임하고, 울산이 우승을 하고 이런 말을 들었어요. 현영민이 돌아와서 울산이 다시 우승을 했다고요. 어시스트 한번 한 것이 결승골로 연결되면서 그런 말을 듣게 되었죠. 엄청 기뻤어요. 더 노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울산에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울산의 승리와 우승에 작은 역할도 중요하지만 큰 역할도 많이 하고 싶은 게 제 욕심이에요. 이번에 김정남 감독님께서 200승 달성을 하셨을 때 감독님이 처음에 헹가래를 거절하셨어요.
우승하고 해달라고요. 그런데 (유)경렬이 형이 워낙 힘이 세서, 한 번에 감독님을 올리는걸 보고 우르르 달려가서 헹가래를 해드렸죠. 올해 우승하고 감독님이 멀미를 하실 정도로 헹가래를 해드리고 싶어요. 울산에 큰 도움을 하고 싶은 게 언제나 제 욕심이고 바람이에요”
이제 자신의 명예보다는 팀을 위해 뛰고 있는 팀의 주축 선수이다. 중간층 선수들이 없기 때문에 팀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현영민. 자선축구에서 헛다리짚기를 하던 재미난 그의 모습이 떠올리니 의젓한 선배의 모습은 어디에 감춰두었을까 하는 괜한 걱정도 드는 기자이다. 하지만 그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너무나 높지 않은 선배의 역할을 하는 그의 진지한 모습도 같이 떠올랐다.
“이제는 팀의 맏형이지만 여전히 플레이를 하는데 단점도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고쳐야 되는 건데도 아직까지 잘 안 고쳐져요. 제가 승부욕이 강해서, 경기가잘 풀리지 않으면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불필요한 경고를 받을 때가 있죠. 여전히 고치려고 노력중이예요.
장점은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킥에 있어서는 최고인거 같아요. 노력도 그만큼하고, 훈련도 많이 하려고 노력했죠. 아, 제 위치에서 필요한 드로잉도 장점으로 손꼽을 수 있을 거 같아요.(웃음)
지금은 축구의 모든 것에 집중했어요. 가족들을 그만큼 돌보지 못했어요. 아들로써나, 남편으로서 나요. 은퇴를 하게 되면 먼저 한 달이던, 일 년이던 제가 받은 사랑을 가족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팀의 맏형인 그, 은퇴 후 유소년 코치가 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축구를 하면서 받아온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를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크다. 꼭 보답할 시간을 마련해서 돌려주고 싶다는 그, 마음까지 따듯한 남자, 아들, 가장이었다.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해요. 남들이 축구선수 현영민을 기억 할 때는 언제나 ‘아, 그 사람 축구 정말 재밌게 했어’라고 기억될 수 있게 재밌게 축구를 하자. 저는 축구는 한편의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곳을 뛰는 저는 영화배우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정해진 시간 내에 좋은 작품으로 관객을 기쁘게 하잖아요. 축구 또한 필드위에서는 화려한 모습도 보여주고 멋진 경기로 경기장을 찾은 분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저는 필드에서 공을 차면서 멋진 작품을 완성하는 영화배우라고 생각해요.”
“올 시즌 울산의 우승에 큰 도움이 되고 싶어요. 한 시즌 교체 없이 건강하게 풀타임을 뛰는 것이 제 목표에요.”
필드에 앉아서 사진을 찍다보면 짧게 신은 양말과 신 가드가 렌즈 안으로 들어오면 언제나 그가 필드에 있음을 느낀다. 아쉽게도 이번 남은 시즌 부상으로 인하여 전 경기 출전의 꿈을 이룰 수 없으나, 현영민에게 있어서 도전은 땔 수 없는 것이기에 내년에는 꼭 전 경기 풀타임의 목표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K리그 명예기자 장혜진